2020년은 넷플릭스 최고의 해였을 것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집안에 짱박혀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넷플릭스 몰아보기'는 더이상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민의 취미가 아닌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의 컨텐츠가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마도 넷플릭스의 모든 컨테츠 중에 다 보고 나서 "재미있었다"라고 말할만 한 것은 전체 컨텐츠 양에 비해 매우 작은 수에 불과할 것 같다. 넷플릭스 오리지날 컨텐츠들은 어딘가 '넷플릭스다운' 면모들이 있는데, 이것이 반드시 성공적인 제작방식은 아닌 것 같다. 전세계 시청자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반영해서 (인종/소재/지역 등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한편, 참신한 소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시청자로서 이 두가지는 반드시 장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다양한 국가의 작품을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장점이고, K드라마의 강세는 이런 동향의 덕을 크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자본으로 프로덕션의 품질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결과물들은 전체 시리즈를 끝까지 보기엔 매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언제든지 뒤로 가기를 눌러 다른 작품을 찾아보기 쉬운 OTT 서비스에서 아마도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보지 않고는 못배기는' 정도의 흡입력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넷플릭스 컨텐츠 중에 재밌었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대부분 원작(소설)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검증된 원작을 화면으로 잘 옮기는 것도 쉽진 않지만, 넷플릭스는 나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위처', '인투더나이트' 그리고 최근 공개된 '퀸스겜빗' 까지, 성공적인 시청률을 이끌어 냈고, 특히 10월23일 공개된 '퀸스겜빗'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찬사를 받고 있다.
"퀸스겜빗"은 올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 중에 최고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연기와 연출, 각본 그리고 1960년대의 의상과 세트의 완벽한 재현으로, 만약 넷플릭스에서 '최고의 작품상'(이라는 게 있다면)을 수상해야 마땅하다.
퀸스 겜빗 Queen's Gambit
10살의 나이로 고아가 된 "베스"는 우연히 고아원 지하에서 관리인 아저씨가 체스를 하는 모습을 보고 체스를 시작하면서 지역 체스대회에서부터, 전세계 최고의 체스 챔피언을 상대하기 까지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체스가 매우 중요한 소재이진 하지만, 체스를 모르는 것은 보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단지, 체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체스말의 움직임을 여러가지 경우의 수로 나누어 초반의 전략을 '오프닝'이라고 하고(퀸스겜빗은 수많은 오프닝 중 하나의 이름이다), 중반을 '미들게임', 후반의 전략을 '엔드게임'이라고 한다는 정도만 알아두면 될 것 같다. 그보다는 체스라는 정적인 게임을 어떻게 흥미진진하게 담아내는지가 더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작품은 "빌런"이 없다. 그리고 딱히 "갈등"이라고 할만한 사건도 없다. 또한 미스터리도, 대단한 반전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저 선형으로 흘러가고, 고난을 극복한 주인공의 승리라는 당연한 결말을 향해감에도 불구하고, 초반의 에피소드들은 미스터리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느낌으로 빠져들게 된다. 보는 내내 '바로 다음 내용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초반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의외성에 있다. 첫화에서 고아원에 보내진 장면들은 클리쉐들로 점철되어 있다. 자동차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주인공을 두고 경찰들이 대화하는 장면, 고아원으로 아이를 데려다주는 차안에서 위로를 가장한 값싼 동정어린 시선, 그리고 등장하는 어딘지 위선적으로 느껴지는 원장선생님. 이런 장치들로 인해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이제 혹독한 어린시절을 보내게 될 것을 예상하고, 주변인물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분류하려고 들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오리무중이 되어가는 것은 모든 등장인물이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매정해 보이는 원장선생님도 악인은 아니었으며, 아이들이 매일 받아먹는 두알의 약도 마치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사실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것이었을 뿐이다. 이런 장치들을 이용해 만들어낸 첫 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혀 충격적이지 않은 장면으로 시청자를 충격에 빠트리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또한 베스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플래시백은 아주 짧막하지만 많은 것을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고, 현재의 베스의 심리와 행동을 완벽하게 설명해준다. 베스가 고아원에서 살다가 어느 중산층 가정으로 입양된 후 만나게되는 양어머니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악행을 하지 않아도 시청자들은 보는 내내 어쩐지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불안해지는데, 그것은 아마도 베스의 양어머니가 자신을 술과 약물로 망가트리는 모습때문일 것이다. 남을 학대하는 행동만큼이나 파괴적인 것이 자신을 학대하고 망가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베스가 술과 약물에 빠져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테고, 그 과정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 천재적인 소녀가 불행을 딪고 자신의 기량을 펼치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슴졸이게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베스의 주변에는 그녀를 응원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파괴하며 그녀에게 애정을 보여준 주변인물들에게 상처만 주는 것을 계속 보고 있자면, 이 극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베스 자신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착하고 정의로운 인물만이 주인공인 세상에서, 베스는 흡입력이 있는 캐릭터이다. 이 드라마에서 베스가 커다란 눈으로 올려다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주인공 "베스"를 연기한 Anya Taylor-Joy가 아닌 다른 베스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만큼 활약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이 배우는 가공의 이야기지만 마치 실존인물의 전기 영화인 마냥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지금 당장 시작할 가치가 충분한 드라마, 2020년 넷플릭스 최고의 발견은 '퀸스겜빗' 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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